사실 '이상주의자'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상주의자'라는 타이틀로 난 미래의 내 멋진 모습을 생각하며 나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너는 왜 살아?"라는 질문에, 나는 "경험해보기 위해 살아"라는 대답을 하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로서는 무엇을 해보는 행위에 의의를 두는 편이고 내 메모장엔 '버킷리스트'와 '수능 끝나고 할 것'이라는 체크리스트들이 즐비하다.
수능이 끝나고 나서부터는 모든 세상이 나의 것이고 내 인생은 나의 뜻대로 흘러갈 것 같다. 우선 내가 원하는 2022년을 살기 위해선 돈부터 많아야 하니 나는 많은 알바를 해야 한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정말 돈을 많이 쓰기 위해서다. 체크리스트들을 차례차례 부셔나가기 위해선 어림잡아 달에 200만원은 필요하지 않을까..
200만원 버는 게 쉽겠나 하겠지만, 어찌어찌 꿀알바를 찾아(시작부터 안될 것 같다) 경험이라 생각하며 사회초년생 서타일로 부지런히 일하면 된다. 그런데 난 많이 게으르다. 날 움직이게 하려면 강제적인 수단이 동원돼야 한다. 그래서 알바가 일석 이조다. 돈도 벌고, 날 움직이게 하고. 알바를 많이 하다보면 보상심리가 생겨서라도 놀지 않을까? 엄마께도 미리 말씀드려놨다. 엄마.. 일요일을 우리 가족끼리 밥먹는 날로 하자. 그 이외에 날엔 날 찾지 말아줘.
좋아하던 노래도 짜증나게 만드는 아침의 알람소리와 빨리 일어나라며 재촉하는 엄마의 잔소리가 합쳐진 정신없는 아침들이 지나가고, 지금이 몇 시인지 모를 나른하고 여유로운 주말의 기상은,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한 신의 자비가 되었다.
점점 수능이 다가와 현실을 직시하게 된 나는 요즘 한 달 전과의 '이상주의자' 나와는 다름을 느꼈다. 벌써 난 고3이 되었고, 결국 어찌어찌 수능을 보고 나서도 나는 똑같은 '나'가 아닌가. 내가 이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간다면, 결국 내가 생각하는 2022년은 '성인이 되어 자유를 만끽하는 겁없는 스무살'이 아닌 '고3이면 누구나 한번쯤 상상했던, 상상만 해봤던, 수능 후의 멋들어진 유니콘 인생'뿐이 될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불안과 직시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난 주말에 느낀 여유롭고 나른한 주말의 오후 덕에 난 다시 예전의 이상주의자가 되었다. 난 참 단순한 사람인가 보다.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아직 남아있는 선선한 바람이 늦잠잔 후 공부하기 싫어 게으름 피우다 겨우겨우 밖으로 나온 나를 맞았다. 절로 감성을 타며 내년 이맘때 이런 좋은 날씨에 친구들과 재밌게 놀고있을 생각을 했다. 이정도면 병 아닌가.. 싶다가도 이정도 망상은 오늘 일에 좋은 동력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은 그래선지 공부가 잘 됐다.
메모장에 써있는 체크리스트들 중 하나는 '대학생 때 책 쓰기'다. 지금부터라도 글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글 쓰는 걸 미루다 미루다 이제야 쓴다. 지금 이 글도 사흘 째 쓰고 있다. 글 쓰는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쉽지 않은 것 같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난 술술 잘 읽히는 글을 쓰고 싶은데, 당연하지만 난 아직 많이 부족한가보다. 무엇보다 스쳐가는 생각들을 글로 풀어쓴다는 게 정말 어렵다. 어찌어찌 글로 적어도 이 글과 같이 의식의 흐름대로 쓰게 되고, 글로 표현하다보니 나의 가벼운 생각들과는 다른 글자만의 진중함이 나를 너무 오그라들게 한다.
난 내가 이상주의자인 것이 싫지 않다. 내가 이렇게 미래를 그리며 살아가게 된 것은 단순히 나의 성향이라기보다 주변 사람에게 받은 영향들의 결과일 거다. 나는 나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고, 주위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난 이렇게 꿈꾸며 살아간다.